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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 리뷰

문화 예찬 2008/09/18 02:45
 

디지털 카메라에 부는 복고 바람


애초에 아날로그 제품이 있었기에 디지털 제품이 있는 것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멋을 그리워하고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성능을 부러워한다. 그러면 이 둘을 만나게 해주면 어떨까? 첨단 디지털 카메라 업계가 이러한 클래식 아날로그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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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999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종착역 안드로메다별에 도착한 철이. 이제 그토록 꿈에 그리던 기계의 몸을 얻어 영원불멸의 삶을 얻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기계문명의 중심지인 안드로메다에서 철이는 참으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한 기계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꺼버리기(?) 위해 탑 위에서 몸을 던진 것. “영원한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야….” 마지막 중얼거림이 우레처럼 철이의 마음을 강타한다. ‘사는 목적을 잊은 저 기계인간이 되기보다는 아프기도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지 않으면 피곤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몸이 더 낫겠어.’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카메라 세계에서도 더 높은 해상도와 더 빠른 반응 속도를 종착역으로 삼은 고기능 디지털 카메라가 가난한 유저들의 꿈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일일이 손으로 조정해줘야 하는 낡은 구형 카메라로 내공을 쌓으며 ‘사진은 카메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방점) 카메라를 사용해 사진을 찍는다’고 주장한다. 똑닥이 디카로 사진의 세계에 입문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의 함정인 ‘더 좋은 기계가 사진 실력을 높여 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준열히 꾸짖고 수동 카메라로 사진을 배워봄을 권유함은 물론이다.


수많은 문파가 존재하는 카메라의 세계에서 이들은 크게 3개 파벌로 나뉘어 만만찮은 세를 과시한다. 집안의 장롱 속에서 나온 부모님의 카메라를 꺼내들고 수십 년 묶은 곰팡이를 제거하느라 여념이 없는 ‘장롱파’, 장롱에서 아무 것도 안나오자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것이라도 건지기 위해 만물시장을 뒤지는 ‘황학동파’, 아예 외국으로 눈을 돌려 수많은 외국의 바이어들과 경매에 입찰하느라 밤을 세기 일쑤인 ‘이베이파’. 때로는 이 순서대로 발전하여 콜렉터의 대열에 오르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RF(Range Finder)형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다. 지금도 라이카의 M시리즈나 콘탁스의 G시리즈 같은 프로용 고급 카메라에서 고수하는 레인지 파인더 방식은 렌즈와 사람이 파인더로 보는 상이 다르며 두 개에 맺힌 상을 일치시켜 거리를 재야한다(한마디로 불편한 거다). 그 불편함 속의 인간적인 면에 매료되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놀타 Hi-matic 시리즈와 올림푸스 35시리즈, 코니카 C35시리즈, 캐논의 G시리즈 등이 이들의 손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동호회의 잦은 발길로 황학동의 물건은 이미 씨가 마른 상태이다.


오로지 이런 마니아를 위한 제품이 최근 출시되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개최된 ‘PMA 2004’에선 세이코 엡손의 라이카 M 마운트를 채택한 세계 최초의 RF식 디지털 카메라가 큰 화제를 모았다. 라이카의 Hektor 렌즈를 장착하고 투명 아크릴 케이스에 전시된 이 제품에 사람들의 관심이 끌릴 수밖에 없던 것은 외관 사진이 국내 사이트를 돌면서 ‘합성’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제품 상부에 배치된 아날로그 미터는 마치 크로노그래프 같은 디자인으로 배터리 잔량 등을 체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날로그 스타일'을 완성하는 정점으로 필름감기 레버를 달아 놨다. 디지털 카메라에 필름감기 레버라니? 낚시꾼이 손맛을 중시하듯이 셔터감과 필름 감는 맛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마니아들의 까다로운 구미를 맞추기 위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크로스오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만큼 ‘디지털’이란 느낌을 쏙 빼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게다가 AF도 불가능. 손으로 거리를 맞춰서 찍어야만 한단다. 디지털 카메라는 렌즈가 반드시 필름 앞에 있어야하는 구조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얼마든지 특이하게 만들 수 있지만 초창기 ‘첨단 스타일’은 시장의 냉소를 견디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이젠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한 클래식한 디자인이 디지털 카메라의 새 화두인가 보다. 작년 11월에 발표된 파나소닉의 LC-1 등 신제품 디지털 카메라를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엡손, 이렇게 파격적으로 나올 줄이야!

ps. <How PC> 2004년 4월호, 디카 칼럼. 지금 읽어보니 넘 구닥다리 내용이라 민망하네... ^^*

Posted by B.H.
 

내 인생의 모든 것은 건축으로 이어질 뿐



얼떨결에 모 CF의 광고를 찍기 위해 뉴질랜드로 갔다. 1주일 내내 추위로 콧물을 흘리며 경비행기를 몰았다. 불과 몇십 초로 압축된 광고에서 그녀는 인생에 투자하라고 한마디 한다. 엄마가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아들 지모(6)는 상당히 좋아했다. 아들은 엄마의 말이  삶 자체에서 나왔다는 걸 이해하고 있을까?


외로웠었지. 집에 돌아와도 따스하게 맞아주는 가족이 없었다는 것. 그때가 겨우 중학교만 졸업했던 나이였는 걸. 15살의 나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린 부모님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지금에 와서야 그것도 사랑이었구나, 그 마음 편하진 않았겠구나,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느덧 부모가 되어 하나뿐인 아들 지모를 보면서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철저한 자립이었다면 난 너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 싶구나. 삶이란 하나뿐인 거란다. 지모야, 너는 마음껏 날려무나. 그 대신 너의 판단과 선택으로 날아야 한다. 엄마는 너의 안전망이 되어줄게. 서커스의 줄타기에서 언제나 아래에 놓여있는 그런 안전망이.


하나뿐인 인생, 정말 하고 싶은 걸 선택해야지

내가 선택을 얘기했지? 나는 건축을 선택했단다. 엄마의 언니, 동생들 이렇게 5남매가 모두 음악을 좋아했기에 나 역시 한국에서는 음악을 공부하다가 미국의 대학에서 건축을 선택했거든. 그리고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 젊은 시절, 학교에서 매일같이 밤을 세고 밥을 먹지 않아도 마냥 좋기만 했어. 건축, 건축은 내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서 공부했던 것을 떠올리며 나와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 경우도 많았지. 하얀 제도판 위에서 선 하나를 갖고 고민하다 ‘식사 하셔야죠’ 소리에 깜짝 놀라곤 해. ‘내가 공부할 때는 말이야, 밥먹는 것도 잊었다구’ 이런 꼰대같은 말이나 하는 엄마가 싫지? 맞아. 내가 이런 삶을 살았다고 모든 사람이 같으리란 법은 없단다. 건축이란 언제나 인생의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해 주거든. 건물이 모두 다르듯이 삶도 각각 다르단다. 삶이 모두 다르기에 사람이 사는 집이 그 사람에 맞게 지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엄마는 집을 짓는 게 좋아.


아들아, 너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었단다

8년 전인 94년,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뭔가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건축 대학원을 마치고 한 건축 학교의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건축가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집을 지어봐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생각하다가 마음이 움직였거든.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게 몇 년 만인 것일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많이 달라졌더구나. 엄마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교나 사회나 모든 것이 군대 같았단다. 학교에서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단속하고 정해진 스카프 이외는 금지되었던 곳. 숨막힌 것보다 외로운 것이 나았을까? 난 미국에서 사람들의 피부색, 머리카락 색이 다 다르다는 것이 너무 좋았어.

한국에서 처음부터 바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어. 여기서 한 가지 엄마의 성격을 말해줄게. 난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살아오지 않았단다.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러면 자신이 선택한 길에 후회가 남지 않거든. 그러다가 아빠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너를 낳았단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어머니에게 모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고 사람들은 말하지. 그렇지만 지모야. 너로 인해 내가 힘든 것은 전혀 없단다. 너는 나에게 제일 큰 선물이거든. 너로 인해 생각이 바뀌고 나의 건축이 바뀌어버렸을 정도로.


두 팔 벌려 주어진 기회를 모두 안고 싶은 욕심

엄마가 왜 집과 건축 사무소를 합쳤는지 아니? 나는 다 갖고 싶었거든. 욕심쟁이란다, 이 엄마는. 너에게 해주고 싶은 걸 다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는다는 게 싫었어. 내가 말했잖아. 엄마는 지모가 정말로 원하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달려갈 수 있다고.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싶었어. 이제 지모가 밤에 잠안 온다고 전화하면 올라가서 동화책도 읽어주고 자장가도 불러줄 수 있어서 좋아. 내 사무실이 있는 2층에서 너의 방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계단을 넌 참 좋아하지? 엄마도 좋단다. 이렇게 마음을 이어주는 오작교를 설치할 수 있는 것, 엄마가 건축가인데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니?

사무실의 책상 옆에는 지모가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이 붙어 있어. 네가 그린 집을 보면 오히려 엄마가 배워야 할 것 같구나. 그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 내가 건축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화해하기, 경계 허물기, 서로 연결시키기가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모가 지금처럼 “하늘은 왜 꼭 파란색으로 칠해야 하나요?” 물어볼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왜 세상에 ‘고정관념’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어. 어떤 몹쓸 사람이 그런 걸 퍼뜨렸을까? 똑같은 것만을 반복하다보면 거기서 멈춰버리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운동을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수영을 배우다가도  ‘내가 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지?’ 생각이 들면서 하기 싫어졌으니까.


내 안의 모터를 계속 돌아가게 하고 싶다

사람들은 내가 참 재미있게 산다고 얘기해. TV CF 에 나가면서 엄마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단다. 경비행기를 몰고, 패션쇼의 무대에 섰던 적도 있었고, 재즈가수와 함께 무대에서 노래도 불렀으니까. 내 인생을 지금껏 이끌어 온 게 있다면 순간순간을 재미있게 지내야 한다는 거야.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다 끌어안고 싶으니까. 재미가 내 인생의 활력소가 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게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사실 너무 건축만 생각해서 문제인데 말이야. 나에게 건축은 인생과 같다고 말했잖니. 그 시도는 모두 엄마의 건축에 활력을 불어넣는 시간이었단다. 비행기를 타면 높은 곳에서 공간을 조망해 볼 수 있어 좋았고, 무대에 서면 조명이란 빛으로 무대와 관객이 나눠지는 걸 생각했으니까. 끈질기게 하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사고의 깊이 또한 점점 늘어가는 법이거든. 지모는 아직 어리니까 잘 모르겠구나. 새로운 기회, 그 기회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란다. 육체적 성장이 끝나도 정신적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거든. 그게 계속 내 몸 안의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힘이 되잖니.


오늘 어떤 기자가 찾아와서 나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묻고 갔단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얼까 계속 생각해봤지. 난 한번도 건축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던 것 같아. 일을 했던 사람과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게 아닐까? 젊은 날 나를 불태웠던 열정이 아직까지 내 삶을 좌우하고 있단다. 아들아, 너는 너의 인생을 찾으렴. 그 열정을 꺼뜨리면 안된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어떤 인생을 살았었는지 궁금할 때 지금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ps. 

의대를 목적으로 들어간 콜롬비아 대학에서 서혜림 씨는 건축으로 전공을 선택한 후 하버드대 건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쿠퍼 유니온 스쿨에서 객원교수로 지내다가 94년 귀국, 국립문화재 연구소청사, 현대 아이파크 견본주택, 무속 박물관, 서울시청 직장어린이집 등을 지었다. 한국 건축가 협회상, 서울특별시 건축상 등 굵직굵직한 상을 수상하며 건축계의 대표적인 여성파워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건축 스튜디오 이름을 ‘힘마’(himma)라고 지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남장을 하고 전투에 나가 가장 용맹하게 싸웠다는 여자 장수의 이름이며 그 어원은 ‘새로운 도전’이란 뜻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힘내 임마’라고 한다지만.

ps2.
<행복이 가득한 집> 2003년 8월호 인터뷰 기사. 사진 찾을 수 없어서 못넣었다...

Posted by B.H.
 

인물: 김지숙, 연극배우. 84년 <아가씨와 건달들>로 백상연극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 자신의 팬만으로 연극을 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 특히 <로젤>은 1990년 12월부터 1998년 11월 안동공연까지 2300여회, 80만 이상의 사상 최장기 공연과 최다 관객 동원한 모노드라마였다. 2000년부터 전국 고등학교 무료 순회공연을 시작, 학생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있다. 무대 위에서는 카리스마의 화신이지만 홈페이지(www.kimjisook.com)에 가보면 올라오는 글 하나하나에 친언니, 친누나처럼, 때론 친구처럼, 연인처럼… 세심하고, 친근한 답변을 달아주는 그녀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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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위, 어둠 속 의자 위에 앉아있다. 조명이 켜지면 시를 읊기 시작한다.

네가 황제다. 고독하게 살아라 - 푸쉬킨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 / 너의 소중한 생각의 열매들을 실현하라. / 그리고 너의 고귀한 행동에 대한 아무런 / 보상도 요구하지 말아라. / 보상은 바로 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 네 자신이 너의 최고 재판관이다. / 다른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너는 제 자신의 / 작품을 심판할 수 있다. / 너는 네 작품에 만족하는가? / 의욕 많은 예술가여!


이 시는 처음 연기 할 때부터 나의 화두로 삼았던 거예요. 연기자로 생활해 왔던 세월을 되돌아보면 나는 완벽을 추구해왔어. 작업을 할 때 다들 연극을 위한 약속으로 모였잖아. 지금은 굉장히 원만해 졌지만 그 약속에 어긋나는 걸 난 못 참아. 기본적인 약속을 지킨 다음에 창조를 하는 거고 창조의 바다 속에 빠졌다가 다시 정제돼서 올라오는 게 연극이거든요.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만났을 때는 일상을 뛰어넘고 나를 초월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게으르고, 자기연민이 강하고 인간적인 정에 기대어 관계를 맺으려는 연극인을 볼 때, 자기네가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모르는 나태함을 볼 때, 그들과 부딪치고 끊임없이 싸웠죠. 그래서 내가 드세다고 하나봐요.(웃음)

그렇게 해도 무대 위에 올라가면 실수가 있어요. 하고 나서 미련이 남는 게 연극이더라고. 연극이 나에게 세속적인 종교라면 이 시는 나에게 경전과 같아요. 난 아침에 일어나서 이 시를 읽어. 나를 점검하는 하나의 잣대로서 말이에요.


- 불이 꺼지고 70년대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다시 무대가 밝아진다.

내가 연극을 하게 된 계기요?(웃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실수를 했거든요. 실수로 연극을 하게 됐다니 웃기죠? 난 사춘기를 굉장히 심하게 앓았어요. 그 혼란스러운 시기가 대학 졸업반 때까지 갔으니 굉장히 길었던 셈이죠. 가정에서는 편애를 받으며 애지중지 자랐고 학교에서는 도덕적인 기준을 배웠지만 막상 세상에서 접하는 것은 너무나 다른 거예요. 그 괴리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런 혼란이 고통스럽고 무섭고, 세상이 거짓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가 일어서 극도로 폐쇄적인 채 지냈어요. 대학졸업반 때까지 사람들하고 거의 말을 안 했으니까 알만하죠? 남한테 관심도 없었고. 나만의 성에 갇혀 살았어요.


- 일어나서 객석을 향해 선다.

그런데 교수님이 걱정이 된 거야. 제가 졸업하면 어떻게 살 건가. 나를 부르셔서 대학 졸업하면 뭘 할거냐고 물으시더라고. 정말 세상엔 운명이란 게 있나봐. 별안간 내 입에서 “연극이요”라는 말이 나온거 있죠. 그 전까지 나는 연극을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고, 연극을 본 적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내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을까? 다음날 바로 교수님이 날 ‘극단 현대’에 입단시켰어요. 난 집에서 이런 걸 배웠어요. 가부장적이고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집에서 여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자랐지만 군인이셨던 우리 부모님은 두 분다 영웅의식이 있고 책임정신도 강하셨죠. 넌 할 수 있다. 넌 뭐든지 할 수 있다. 늘 그 말을 해 주셨어요. 실수를 했든 어쨌든 내가 선택을 한 거잖아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지옥같은 극단 생활을 하기 시작했어요. 극단에서 나는 “여기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 말밖에 못했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 음악이 사라지고 정적이 흐른다.

(관객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상상이 안된다구요? 그 때는 정말 그랬어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가 말시키면 얼굴이 빨개졌고. 연습할 때 손을 올리게 되면 혹시 실밥이 뜯어진 게 있지 않을까, 치마가 올라가 속치마가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으니까요. 그 때까지 나의 세계는 온실 안이었어요. 연극영화과 출신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개성이 너무나 유별난 사람들 뿐이라 연극계라는 게 인간이 아닌 사람들만 모인 것 같았다니까요. 그 사람들 속에서 한쪽 구석에 앉아서 어리둥절해 있는 나. 그러면서도 날 훈련시킨다고 텍스트를 주면 그걸 밤 세워 연습했죠. 남 열 번하면 난 천 번하고, 잠을 자면서도 내가 연습을 한다는 게 느껴져요. 눈뜨면 그거부터 했으니까. 내가 미쳤다고요? 그 땐 그렇게 보였을 거야. 정말 미친 듯이 연습했어요. 3년 동안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독종이라고 해요. 제가 배우가 될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열심히 하나 그랬지. 3년만에 첫 주연을 맡았어요. 무대에 섰을 때 느꼈죠. 내가 보고 느꼈고 부딪쳐야 했던 불신의 세계, 추한 세계가 멀어지는 것을. 내가 윈치 않았던,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 의해 내 세계가 짓밟히고, 침해당하는 고통이 무대 위에선 없었어요. 완벽하게 내가 한만큼 심판 받을 수 있는 그 세계의 공기를 마시고 취해버렸어요. 그 속에 있으니까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잠재력이 있는지, 앞으로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지가 보였어요. 이제껏 벽으로 느꼈던 세계가 확 열렸죠. 그 환희라는 게 말도 못할 정도예요. 정말 실수로 시작하게 됐지만 선택에 충실했고, 쉼표 하나 없이 달려왔네요.


- 불이 꺼진다. 조명이 들어오면 배경그림은 고등학교. 2002년 현대를 알리는 효과음. 교실에서 볼 수 있는 학생용 의자에 앉아있다.

살아오면서 막막하고 세상은 어둠뿐이고 아무도 나에게 해답을 알려주지 않았던 시절. 선생님은 교과서 적인 얘기만 하고, 부모님은 나 잘되라고, 제대로 된 대학가서 괜찮은 남자 만나 시집가는 것만이 행복이라 했죠. 그거 외에는 답이 아닌 거야. 난 내가 살아갈 세상을 내 손으로 찾고 싶은 건데. 정해진 길을 가라고 하니까 숨통이 조였거든요. 그리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사실 몰랐어요. 지난 3년 동안 전국의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연극을 보여줬어요. 연극 한 장면, 장면이 이어질 때마다 학생들이 환호해요. 눈물을 흘려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이런 거라고 말해요.(침묵)

난 그 아이들을 가슴 대 가슴으로 이해하죠. 내가 그랬으니까. 뭔가 자기를 한번 보여주고 싶고 보여줌으로서 자기를 느껴보고 싶은 거야. 그게 꼭 연극을 하고 싶은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근데 학생들은 바로 이거라는 거지. 어떡하면 좋으냐고. 그 중에는 직접 찾아오는 학생도 있어요. 자기의 인생이 한 편의 연극으로 바뀌었다는 편지를 받아요. 왜 그 때까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까요.


- 불이 꺼진다. 다시 불이 켜진다. 배경이 아파트 벽지로 바뀌고 쇼파가 놓여있다.

혹시 <우리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라는 연극을 보셨나요? 그게 우리 집이랑 똑같아.(웃음) 노동운동가인 오빠, 시집간 언니, 나, 권투선수로 세계 챔피언까지 오른 동생, 여동생, 막내는 영화감독 김지운, 이렇게 여섯 남매예요. 부모님이 굉장히 자유롭게 키우셨죠.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이거하지 마라, 저거하지 마라,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런 말은 하셨죠. 나가서 싸우지 마라, 그리곤 다시 한 마디 하세요. 만약 싸우면 꼭 이겨라. 정말 군인정신이죠? 어렸을 땐 그래서 군인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형제들이 커서는 서로 자기 길을 잘 찾아갔죠. 그렇지만 군대에선 교관이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집에서 사셨던 모습은 답답했어요. 이런 점이 싫고, 저런 점이 싫고…. 난 어머니가 알려주신 세계 속에서 살기는 싫었어요.


- 불이 꺼진다. 낙엽이 깔린 길, 조명대신 가로등이 켜진다. 아래 벤치가 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굴까. 어머니도 나를 다 이해하진 못 하는 것 같고. 연애를 하건 남자랑 깊은 사랑에 빠지든 그가 나를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완전히 이해받는다는 것. 그런 것이 존재할까요? 사실은 내가 그걸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사랑을, 불같은 사랑을 꿈꾸는 지도 몰라. 난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지 않아요. 만나면서 교감이 있어야 해. 만날 때마다 뭔가 충돌이 있어야 해. 마음으로, 몸으로 알 수 있어요. 내가 사랑을 느끼는 남자는 따뜻하면서도 쿨한 사람, 절제된 사람이에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지 남자를 만났을 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 참지 않아요. 이 남자 좋아진다 하면 막 표범처럼 대시를 하죠. 나이, 돈, 명예. 이런 세속적인 기준은 없어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있어서 감정을 도덕적인 기준으로 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나는 그래요. 한 남자만 만나서 평생 그 관계를 지켜야 된다. 그건 너무 하지 않나요? 감정은 움직이는 거잖아요. 물론 지키려고 하는 노력은 필요하겠지.


- 불이 꺼졌다 켜지면 다시 맨 처음의 의자 위에 앉아있다.

나는 두 시대를 살아온 거라고 생각해요. 속으로 가부장적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고, 겉으론 당당하게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옷을 입고 살죠. 내가 집에서 그런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이런 옷을 입고 있지만 나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여성이라는 한 인간의 소리가 들려요. 남자, 여자가 아니라 평등한 인간이 말하는 소리가. 그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삶 속에서 뛰쳐나오기 위해서, 현대를 당당한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잖아요. 그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한(恨)이 있죠. 그렇지만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더라. 그렇게 말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정말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 여성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 중의 하나인 성(性)에 대한 것도 그래요. 미혼모, 성폭행, 이혼문제가 다 성 역할이나 가치관이 헝클어지면서 일어나잖아요. 내 인생이 하나의 연극이라면 난 모노드라마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사람이 부부라는 걸 떠나서, 여자라는 걸 떠나서, 사람이 사람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가져야할 기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제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한 인간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하는가, 라고. 그러면서 유쾌한 삶의 모습을 들려주고 싶어. 아주 수다스러운, 끊임없이 사랑, 사랑에 대해서 말하며. 내 진실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난 기운을 내서 연기를 하겠죠. 정말... 고마워요.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막이 내린다.



ps. <행복이가득한집> 2002년 12월호 연극배우 김지숙 선생님 인터뷰. 멋지신 분.


Posted by B.H.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졌나
패션쇼 같은 뮤지컬 ‘십계’…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


뮤지컬 ‘십계’는 고대 이집트를 모티프로 한 거대한 ‘패션쇼’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이 담당한 의상은 이 뮤지컬에서 놓쳐선 안 될 감상 포인트. 루어 바즈만 감독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디카프리오가 프라다(PRADA)를 입고 등장한 것처럼, 의상은 때로 스스로의 가치를 배역에 덧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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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쪽은 소니아 리키엘.아래쪽은 뮤지컬‘십계’의 람세스와 모세

소니아 리키엘의 의상 역시 세르지오 모시케토의 모세 역을 더욱 급진적이고 자유롭게 부각시킨다. 옷을 뒤집어 바느질 솔기가 그대로 드러난 모세의 옷은 소니아 리키엘이 1974년 선보였던 아이디어. 패션쇼 사진을 찍으러 왔던 칼 라거펠트가 “내일이면 모두들 당신을 한 대씩 때리려고 할 것”이라며 농담했을 정도로 반응은 냉담했으나 지금은 ‘탈패션(demode)’이라는 새물결을 가져온 선구자적 시도로 인정받고 있다. 유대인 여성의 의상으로 선보인 소매가 뜯어진 드레스, 끝마무리가 안 된 채 펄럭이는 옷단 등에도 패션계를 휘저은 소니아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골고루 녹아 있다.

▲ 모세 의상
기록상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의상인 이집트 복장은 그녀의 손에서 어떻게 부활했을까?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입은 고대 이집트의 기본 의상, 로인클로스(loincloth)를 보자. 한 장의 고운 린네천이 전부인 로인클로스는 신분에 따라 두르는 법이 조금씩 달랐는데 왕은 가장 많은 주름을 달 수 있었다. 소니아는 람세스의 옷에 세련된 스티치를 넣어 왕의 주름을 표현했으며 계급이 낮은 병사들에겐 아예 민무늬 옆트임 치마를 만들어 입히는 대담한 발상을 선보였다.

치마를 입었던 이집트 민족의 탐미적 취향과 핫바지를 입은 유대 민족의 거센 저항은 해파리와 고등어만큼이나 이질적인 의상 속에 이미 예견되어 있는 것. 그녀가 무대의상에 손을 댄 것은 ‘십계’가 처음이다. 그렇지만 출연자의 개성에 맞게 디자인된 의상들은 단순한 의상을 넘어 연출의 영감까지 파고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은 4월 11일부터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 람세스 의상
뮤지컬 십계의 또다른 볼거리

압도적인 무대 덩치부터 압도적이다. 폭 55m, 높이 17m의 무대 구조물인 KT11을 설치해야 해 2000년 프랑스에서도 대형 체육관에서 초연했다. 중앙무대, 좌우의 날개무대,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변무대 등 4개의 무대를 써 장면 전환의 피로를 줄여준다.

음악 대사 없이 음악과 노래로 극을 굴린다. ‘내 형제’ ‘사랑하고픈 마음’ 등 28곡의 장중하면서도 감성이 풍부한 노래가 담겨 있다. 영화감독 출신 연출가 엘리 슈라키가 음악과 음악 사이의 이음매를 잘 다듬어 드라마가 강조된다.

‘홍해 가르기’ 재현 영상 ‘홍해 가르기’ 등 거대한 스펙터클은 영상으로 처리한다. 중앙무대 전면을 쓸 만큼 큰 영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무대 기술 스태프만 130명. 깊이 있는 프랑스식 조명술을 보여준다.




ps. 조선일보 2006년 3월 23일 문화면 청탁 받고 쓴 공연 기사.
http://flash.chosun.com/culture/news/200603/2006032300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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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살림집의 기억을 들추어내다

- 오리 이원익 대감 종택(宗宅)과 관감당(觀感堂)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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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자리잡은 너는 처음부터 지금 같지는 않았다. ‘청백리’라 칭송자자하던 양반이 기거하던 두 칸 초가가, 너의 전부였다. 모습은 초라했으나 긍지는 높았다.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이 세 임금을 모시며 영의정을 지냈던 오리(梧里) 이원익 대감이 너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재상 40년에 어울리지 않는 눈물나는 곤궁을 보며 너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내리는 비를 막아주고 싶으나 무심한 바람은 네 지붕의 짚단을 이미 날려 버린지 오래였다.



인조대왕, 집을 하사하며 ‘관감당’이라 이름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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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9년(1631년) 정월 10일, 관복을 입은 승지(承旨) 한 명이 찾아왔다. 양반이라 거들먹거림 없이 농민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대감은 마실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감 찾기를 포기한 승지, 네 주위를 돌아보며 탄식을 하는 소리를 너는 들었다. “두 칸 초가는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으나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조차 가리지 못하는 구나.” 돌아서 가는 그의 모습에 부끄러우면서 한편으로 화가 났다. 수많은 사람이 와서 혀를 차고 갔어도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마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며칠 후 다른 승지가 전교(傳敎)를 받으라며 문가에 섰다. “재상이 된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이니, 그 도를 시켜 정당을 짓고 또 호조를 시켜 흰 명주 이불과 요를 내려주어 그 숭상하는 것을 성취하도록 하라.” 아, 듣던 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슬은 문설주를 타고 흘러 내렸다. 문에 바른 창호가 뚫리어 바람이 들어와도 읽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분의 격에 맞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밤새 잠을 안자고 뒤척이는 이 양반의 모습이 하 수상하여 너는 다시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초롱이 켜지고 오래 갈은 먹으로 묵향이 너의 안에 가득 퍼졌다. 밤새 쓴 상소문은 왕의 하사를 사양함이 분명했다. 그 후, 승지가 바삐 내려오고 대감이 궁궐에 들어가기가 수어 번, 한 달간 계속된 그 반복을 너는 가슴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너의 소망이 임금의 고집을 높이고 대감의 겸양을 꺾었나 보다. 인부들이 목재를 싣고 와 대지 위에 새로운 너를 짓는 동안 너는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오랜 초가를 벗고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5월, 모든 신하와 백성이 본받으라는 뜻의 ‘관감당’ 현판이 걸리던 날, 너는 다시 태어났다.



370년의 시간을 고택은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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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사물마다 달리 흐른다. 네가 다시 태어나기 이전부터 심어져 있던 측백나무는 아직도 젊기만 하고 너 역시 튼튼하게 지어졌기에 나이듦을 모르고 지냈지만, 네 안에 머물던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4년 뒤 갑술년(인조 12년, 1635년) 정월 29일에 공이 늙어 장례를 치르자 너는 처음으로 죽음을 알았다. 청년은 노인이 되고 아이들은 다시 태어났다. 너의 주인들도 십여 번 바뀌었다. 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네 안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희노애락이 어우러진 인간사를 몸으로 경험했다. 몇 세기가 지나고 인간들의 의관이 변하는 동안에도 너의 모습은 변할 줄 몰랐다. 다만 너도 이제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았다. 기와가 깨지고 기둥이 썩어갔지만 몇 번의 화마를 겪은 게 큰 충격이었다. 임금이 직접 하사했다는 너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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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1916년은 너에게 뜻 깊은 해였다. 네 안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가문이 쇠락과 융성을 거듭하다 11대에 이르러 인근에 땅 부자로 소문이 날만큼 재물이 넉넉히 쌓였으니 말이다. 너는 관감당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깨끗이 다시 지어졌고 이듬해에 관감당을 사랑채로 쓰기로 하고 안채가 새로 지어져 두 배로 커질 수 있었다. 검소함이 이들의 내력인지 인근 마을의 폐가를 사들여 그 목재를 이용해 안채를 짓는 과정이 흐뭇했다. 그 아들이 1940년 무렵 문간채를 새로 세워 너는 비로소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13대 종손 이승규 씨가 태어남을 너는 지켜보았다. 그가 네 안에 머물 마지막 주인이 될 거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1950년, 6월 25일.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저 멀리 들려오고 인간들이 웅성대는 것을 너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인간들이 떠밀 듯이 밀려왔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들의 손을 잡은 낯선 그들은 네 안에 하나, 둘 머물기 시작하여 곧 모든 방마다 가득 찼다. 두려움과 피곤함이 가득한 그들이 기거하던 너의 동료들은 도대체 어떤 환란을 겪고 있는지 한번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는 너는 알 수 없었다.



13대종손의 아들과 손자까지 네 안에서 돌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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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장성하여 신부를 맞이했다. 떠들썩하니 함이 들어오고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는 안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한다는 주인은 매일같이 네 안에 머물 수는 없었다. 지난 수백 년 보다 더 빨리 너를 둘러싼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더 멀리 화차를 타고 일하러 떠나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인간들은 변화를 추구하지만 너는 단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4년 뒤 이승규 씨는 서울로 떠났으나 주말마다 너를 단장하러 내려오는 것을 기쁘게 기다리기로 했다.
네 주위의 친근한 초가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이웃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을 통틀어 가장 늠름하던 너의 모습도 생뚱맞아졌지만 어쩔 수 없다. 너는 기억한다. 예전 양복을 입기 불편해 하던 마지막 선비의 모습을. 선비는 정신이다. 의관이 바뀌었다고 해도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 20년 만에 이웃들이 다시 허물어지고 높이 솟은 거대한 무리들로 채워졌어도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너의 정신은 꿋꿋하니 살아있다. 지금도 네 입구에는 13, 14, 15대까지 3대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있다. 가끔 놀러오는 이승규 씨의 손자는 아직 어리다. 언젠가 그 아이가 크면 너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다. 중국 운남성(雲南省)에는 ‘보이차’(普耳茶)라는 게 있다. 이 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차향만 남은 듯 마른 낙엽처럼 가벼워진다. 적어도 30년은 되어야 숙성됐다고 인정받으며 100년을 넘어가면 진귀한 보물로 대접받는다. 차가 이러할 진데 집이라고 덜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맑은 기운이 서려있는 게 고택이다. 중간중간 고쳐지어졌어도 방문한 사람이 맑은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너. 너는 오리 이원익 대감의 종택, 그 정신이 남아있는 관감당이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이원익(:1547∼1634)의 고가.
지정번호 경기문화재자료 제90호
지정연도 1996년 12월 24일
소재지 경기 광명시 소하2동 1086
분류 고가

ps. <행복이가득한집> 2003년 8월호 기사. 갑자기 한옥을 취재해오라길래 정말 한옥에게 인터뷰 딴 듯이 기사 작성. 사장님에게 한소리 들었다. "'여기서 너'가 누군지 두번을 읽어야 알았다!!"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었나... 당시 이동춘 선배가 찍은 사진을 구할 수 없어 백과사전 사진 사용~

Posted by B.H.

짧은 글

낯선 여행 2008/08/30 01:45
 

안녕, 내 사랑아


남은 생애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녀를 꼭 한번 다시 보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어야 옳았다. 실재로 회사를 무단결근하고 이렇게 옛 학교를 다시 찾은 것은 마음속의 추억을 좇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지하철을 바꿔 탔을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외워두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노래 제목처럼 ‘헤어진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이를 닦다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밥을 먹고, 이를 닦는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고. 그땐 피식 웃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불면의 밤이 지나고 핏발선 눈앞에 일상이 한없이 남루해보였던 그 기분을 나는 벌써 졸업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은 지나치게 일찍 나왔다. 세미나 관계로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전철을 기다리고 보니 평소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빠른 셈이다. ‘10년만이구나.’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 걸까? 혼자서 생각을 하고서도 한참 의아했다. 10년 전, 확실히 나는 매일 아침 6시, 전철을 기다렸다. 대학생이던 그 당시 나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매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김없이 아침 7시면 교정을 함께 거닐었다.

지하철이 한강 철교를 지나가면서 추운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봄볕 같은 햇살이 전철 내부에 퍼졌다. 갑자기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듯, 주변이 아득해 졌다. 이른 새벽부터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는지도 모를 세미나 따위라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충동적으로 다음 역에서 내렸다. 모교로 이어지는 국철을 기다리는 동안 왠지 모를 조바심이 났다. 빨리 가지 않으면 그녀가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1995년의 봄.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미리 다음 번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집으로 전화를 해야 했다. 첫 데이트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의 2층 매장에서(종교 코너는 가장 한가한 매장이니까) 두 시간동안 기다렸고 그녀는 굉장히 미안해하며 나타났다. 돈은 없고 가진 건 시간뿐이던 시절이라 서점이 문 닫을 시간까지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 약속이 부도를 맞긴 했어도 좋았다, 그 때는. 휴대폰으로 심플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최근 읽은 시집을 펴놓고 편지를 적었다. 혹은 아쉬워서 발길을 돌리질 못하는 귀가 시간, 집에 가서 펴보라며 그녀가 손에 쥐어주던 편지봉투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는 왜 싸웠던 것일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 우린 싸웠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졌다. 평생 가슴에 구멍이 생길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렇지만 만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미 두 사람 다 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씩 지났다. 오늘의 나처럼 그녀도 학교를 찾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른 아침의 학교는 너무나 조용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교정에서 옛 추억의 자리를 찾는 것은 쉬웠다. 항상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나무아래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처럼 10년 후의 약속장소를 정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전철역에 돌아왔을 때 플랫폼에 그녀가 서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천천히 걸어가야만 했다. 미처 반가운 표정을 짓기 전에 그녀의 얼굴이 먼저 돌처럼 굳어졌다. 나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잘 지내셨어요?” “네”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10년 만에 처음으로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학교에는 졸업증명서를 받기 위해 왔다고, 몇 가지 세상사는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멀리서 전철이 정해진 시간을 알리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다. 덜컹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내 귀에도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전철에 타고 나한테 손을 흔들어 줬다. 나는 멍하니 전철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적을 불러왔던 아침 햇살의 아지랑이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ps. 2005년 한국판 <마담 피가로>에 썼던 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는 제목을 바꾸는 것이 좋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실 제목 먼저 정하고 나머지는 한달음에 쓴거라 고치지 않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Good bye My Lover> 속 쿨한 형사 필립 말로를 떠올리며 썼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아름답다. 헤어지는 순간은 보통 그렇게 되기 쉽지 않은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신기루와 같은 환상만 남는다.

Posted by B.H.
 

나는 서울을 읽는다



역사에 만약(if)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한류열풍이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로 발생했다면 서울의 모습이 얼마나 달려졌을까? 광화문 영풍문고를 나와 청계천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재미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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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오후 2시, 프림처럼 쏟아지는 오후의 잠을 쫓느라,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는다. 두 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들어선다. 손에 든 것은 『바이올렛』. 오늘따라 신경숙의 팬들이 많이 찾는다.

“실례합니다. 세종문화회관 옆 화원을 찾습니다. 여기서 먼가요?”

“약 10분 정도 걸어가시면 됩니다.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 옆 벽과 마주하고 있는 거리에 두 개의 화원이 있습니다. 작가께서 어느 것이 작품 구상에 영향을 미쳤는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곳 모두 원조 바이올렛 화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 궁금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신경숙 작가님이 계셨던 삼청동 방까지 걸어갈 예정인데요. 혹시 지도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K는 문학거리 지도를 한 장 꺼낸다. 뒷면에는 주요 작품별 도보 동선이 표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바이올렛의 주인공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해 제일은행 본점을 지나 종각, 종로서적으로 이어지며 복합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대학로를 들렀다가 처음의 출발지였던 세종문화회관 옆 화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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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를 보세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하도로 길을 건너시면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거리가 나옵니다. 주인공 진우처럼 한국통신 앞으로 나와서 미국대사관과 문화관광부와 시민 열린마당을 지나 동십자각 지하보도까지 가신 후, 삼청동 방향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K가 일하는 곳은 문학관광안내소다. 기껏 두 평 남짓한 부스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외국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한국 대중문학작품이 본격적으로 외국에 소개되기 시작한지 겨우 5~6년.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한류열풍은 일본,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유럽, 북미의 관광객들까지 옆구리에 책을 끼고 한국을 찾아오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의 열정은 대단해서 전세기를 타고 날아와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의 자취를 좇는다. 정부에서는 홍보효과와 막대한 부가가치에 뒤늦게 눈 떠, 문화관광부안에 소설과, 희곡, 시 등 문학콘텐츠만을 다루는 과를 신설했다. 덕분에 대학 내내 취업 공부와는 담을 쌓던 문청(文靑)들에게도 서광이 비쳤다. 여름내 노래만 부르던 베짱이가 한겨울에 그래미상을 탄 격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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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안내소에서 신경숙과 윤대녕은 인기작가다. 그럴 것이 그들의 소설 주인공은 자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마주치고(『바이올렛』『사슴벌레 여자』), 홍대나 신촌 부근에서 데이트를 한다(『옛날영화를 보러 갔다』). 덕분에 소설 속 동선을 따라가는 외국인들을 위한 여행상품까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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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나무와 벽돌’(조경란의『식빵 굽는 시간』)과 인사동 ‘볼가’(신경숙의『외딴방』) 같은 소설 속 실제 공간은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라 옛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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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작품보다 작가에 더욱 몰두하는 팬들도 눈에 띈다. 한 젊은 배낭객은 기형도 시집을 들고 시인의 모교인 중앙고등학교 후문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물어 본 적 있었다. 30년 전의 기형도를 회상하며 걷고 싶다는 것이다(기형도는 1976년 3월 중앙고등학교 입학, 104번 버스를 타고 안양에서 통학했다). 마지막 종착지는 분명 파고다 극장의 옛자리가 될 것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존 레논을 위한 기념 정원처럼 그 자리에 시인을 위한 작은 추모비가 세워진 이후 꽃다발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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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양귀자)과 삼양동(김소진)이나 봉천동(조경란)처럼 단 한 작가의 독무대였던 곳은 안내소 직원들도 한가한 편이지만 K가 배치 받은 광화문 부스는 워낙 다양한 작가의 팬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치밀한 독서를 게을리 할 수 없다. 자국의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관광객보다 모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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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박완서 작가의 광팬들은 젊은 시절 그녀가 박수근 화백을 처음 만났던 미8군 PX자리인 신세계 백화점(당시 미스코시 백화점, 『나목』)부터 시작해 돈암동 성신여대 입구 지리의 세세한 곳(『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그 남자네 집』)까지 물어온다. 한 작품을 수십 번씩 보고 모두 외운 듯싶은 그 집요함에 경의를!

가장 외워야 할 것이 많은 지역은 명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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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구가 글을 쓰고 이제하가 그림을 그린 『명동백작』이 일본과 동남아를 휩쓰는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명동은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전에도 수십 명에게 십여 문인의 문학적 명소를 알려주길 반복했다. 고백하자면 일정 때의 ‘메이지마치’(명동의 옛 이름)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초로의 일본 노부부 앞에선 딱 한번 말문이 막혔다. 대부분은 김수영, 박인환, 김관식, 서정주, 전혜린 등 이른바 ‘명동파’ 문인들의 팬이다. 이곳은 그들에게 성지순례길이다. 단체 관광객이 몰려오자 ‘마돈나’에 이어 ‘남강’ ‘미네르바’, 그리고 ‘돌체’가 50년 만에 다시 문을 열면서 명동은 문인과 예술인의 거리로 재탄생했다.

물론 그 때 그 분위기가 날리는 없다. 그러나 한류팬들은 그들의 명동시절 모습만을 보고싶어한다. 모든 것이 관광객용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명동에 대해 막연히 금융과 패션의 중심으로만 알고 있던 어린 세대들은 그 시대 그 곳에 열정과 낭만이 있었음을 오히려 역수입해 알게 됐다. 그것 하나만으로 반갑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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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가 되자 안내소 옆 버스정류장에는 인천 문학거리로 떠났던 여행사 버스가 도착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하나 둘 내린다.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심취한 야구팬들은 관광상품용으로 나온 유치찬란한 슈퍼스타유니폼을 입고 있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광선총 모형을 들고 내리는 저 대학생 차림의 남녀, 듀나의 SF소설 『대리전』속에서 부천역과 삼정초등학교를 다녀온 것이 분명하다. 좀 더 나이지긋한 분들은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들고 차이나타운에 들린다.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는 동네’가 이미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별 문제되지 않은가 보다. 김중미의 창작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속 인천 만석동 달동네도 마찬가지다. 숙희와 숙자와 동준이 동수, 영화와 김명희 선생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은 생각에 ‘괭이부리말’ 근처라도 가보고 싶다는 오지랖 넓은 그들의 감동을 누가 말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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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문학에 대해 떠들었으나 K는 고독하다. 구반포 ‘반포치킨’에서 마늘치킨과 맥주 한 잔이 간절한 하루. 시인 황지우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을 추모해 지은 시의 한 구절, ‘구반포 치킨집 부서진 치킨 앞에서 술 취하면/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부드럽게 부르던 김현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반포치킨은 언제나 열려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와 평론의 인기란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덕분에 이곳은 처음 문을 연 27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이 아파트촌까지 골수팬들은 어김없이 찾아오며, 그 징하디징한 팬들에게 K는 묘한 동류의식마저 느끼고 있다. 간직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ps. 2006년 3월 <럭셔리>의 청탁을 받고 쓴 글. 원래는 시리즈로 의도했던 글인데 단 한 편으로 줄여달라고 해서 다 붙여써버렸다. -_-;;; 2007년 <문학 속의 서울>이란 책이 출간되어서 비교해봤는데 관점이 좀 다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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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예찬

문화 예찬 2007/09/20 14:29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전문가 만화의 즐거움


만화의 영역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이른바 ‘전문가 만화’의 등장이다. 30대 직장인들에게 인기인 전문가 만화는 전문 서적을 능가하는 해박한 지식과 만화적 재미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 ‘독서’가 취미인 직장인이 일주일에 한 권 읽기도 버겁지만 만화책은 10권이라도 가능하다. 만화의 세계에 발을 넣을까 망설이는 분, 재미에 더해 관심 분야의 정보까지 손에 넣기를 원한다면 오늘부터라도 만화에 눈을 돌려보자.



미식가 클럽의 필수품_요리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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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가장 많은 매체에 소개된 만화는 <신의 물방울>(아기 타다시 글,오키모토 슈 그림, 학산문화사, 9권 발간)이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의 아들이 아버지의 컬렉션을 상속받기 위해 젊은 프로 와인 평론가와 대결한다는 전형적인 구도지만, 주인공들의 눈앞에 실재하는 듯 현란하고 환상적인 와인에 대한 감상평은 만화계와 와인계 양쪽을 뒤흔들어놓았다.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성문기본영어>란 교재에 비견될 만큼의 만화책이지 싶다. 어찌나 많은 곳에서 이 만화 이야기를 들었던지 정말 생활을 바꿀 만한 힘을 지닌 만화책이란 생각도 든다. <신의 물방울>로 만화의 드라마틱한 재미와 풍부한 정보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음식 만화분야의 고전인 <맛의 달인>(카리야 테츠 글, 하나사키 하키라 그림, 대원씨아이, 96권 발간)에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83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최근 96권이 발간된 이 음식 백과사전은 전문가 만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만큼 좋은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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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두 권을 보고 난 후에는 각자 좋아하는 음식 주제를 찾아 자유롭게 보는 편이 이 만화를 즐기는 지름길이다. 예를 들어 와인 애호가라면 74권 ‘황홀한 와인’과 78권 ‘와인 대작전’ 을 우선 읽어보자. 장인 정신을 지닌 작가는 최근 일본의 빈약하고 오염된 식재료에 환멸을 느껴 식재료가 풍부한 오스트레일리아로 아예 이주해버렸다고 한다. 요리 만화는 미식가에게 새로운 맛의 세계를 알게 해주는 부류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설렘을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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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에 충실한 부류가 있다. 앞선 두 만화가 전자에 속한다면 후자에는 <빈민의 식탁>과 <아빠는 요리사>(우에야마 토치, 학산문화사, 89권 발간)가 대표작이다. 이 중 <빈민의 식탁>은 절판된 상태라 시중에서 구하기 힘들다. 백수인 아버지가 단돈 100엔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차려준다는 내용으로 ‘~천원으로 밥상 차리기’라는 출판계 초히트작 아이디어가 이 만화에서 나왔다고 출판 기획자는 밝힌 바 있다. <아빠는 요리사>는 뛰어난 요리 솜씨를 숨기고 사는 무뚝뚝한 성격의 평범한 회사원 ‘일미 주임’의 따뜻한 일상을 요리로 풀어나가는 만화다. 맛을 찾는 치열한 경쟁도 없고, 요리 견습생의 눈물겨운 분투도 없지만 과장된 요리 만화에 질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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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쪽을 더 좋아한다. 전문가 만화가 부족한 국내 만화계지만 그중에서 허영만 화백은 독보적이다. 특히 <식객>(허영만, 김영사, 14권 발간)은 음식 만화의 맛깔스러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직접 영광 굴비 덕장을 가고, 태백 매봉산의 고랭지 배추 밭을 헤매고, 60년 전통의 곰탕집 비밀을 캐내어 최고의 솜씨로 종이 위에 요리한다. 쌀에서부터 출발해 굴비, 전어, 전통 술, 매생이국, 과메기, 갓김치, 홍어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음식 문화를 총망라하고 있어 두고두고 꺼내보는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실재하는 음식점을 다뤄 직접 찾아가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부족한 교양을 채워보자_음악 & 미술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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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만화 중에는 기본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한 작품과 즐겁게 보다 보면 그 분야에 관심이 저절로 생기는 작품이 있다. 음악 만화의 최고봉인 <벡 BECK>(사쿠이시 해럴드, 학산문화사, 28권 발간)은 록 음악계를 수놓은 수많은 스타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즐거움의 폭이 달라진다. 비틀스, 라디오헤드, AC/DC, U2 등 유명 록 그룹의 앨범 패러디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고, 미국 순회 공연 중에는 커트 코베인이 노래한 클럽, 지미 헨드릭스가 잠든 무덤에도 들르는데 음악 팬에게는 가슴 두근거리는 대리 경험이다. 평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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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우연히 만난 친구 덕에 기타를 잡고 인디 밴드를 결성해 록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고난의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직장인 밴드라도 결성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 생긴다. 일본에서는 <벡, 음악 가이드북>이 따로 발간되었다. 반면 <노다메 칸타빌레>(나노미야 토모코, 대원씨아이, 15권 발간)는 아무런 준비 과정이 필요 없다. 일본과 프랑스의 음악대학이 무대인 이 클래식 로맨스 개그 만화는 학창 시절 음악 시험에 트라우마가 있던 독자라도 정신없이 웃다가 베토벤과 모차르트에 관심을 가질 만큼 매력적이다. 순정 만화 사상 가장 지저분하고 뻔뻔한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며, 일본에서는 만화에 소개된 곡을 모은 앨범과 만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오케스트라 이름으로 클래식 앨범이 발매되는 등 현재 클래식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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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페이크>(후지히코 호소노, 서울문화사, 32권 완간)
는 희귀한 미술 전문 만화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큐레이터 출신인 주인공이 도쿄에서 ‘갤러리 페이크’라는 복제 미술품 갤러리를 운영한다는 설정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독자는 매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이 국제 미술품 밀매단, 컬렉터, 미술관 큐레이터 등과 싸워 미술품을 복원하고 획득하는 과정에 푹 빠지게 된다. 미술 관련 종사자가 하는 일도 실제에 가깝게 알게 되고, 에피소드 하나를 지날 때마다 미술 상식이 부쩍 늘어간다.



레포츠의 기본을 다진다_레저 만화
바둑을 몰라도 전혀 보는 데 지장이 없는 만화 <고스트 바둑왕>(홋타 유미 글, 오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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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시 그림, 서울문화사, 23권 완간).
하지만 보고 나면 신문의 바둑 기보 해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바둑이라는, 우리에게 생소하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스토리 전개 방식과 독특한 캐릭터 구축으로 인해 이 만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둑을 두고 싶게끔 만든다. 일본에서는 <고스트 바둑왕> 덕분에 ‘히카루(주인공 이름) 세대’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 만화가 나온 이후 일본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바둑판 판매가 급증했고, 바둑 교실을 찾는 어린이가 두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거리의 취미인 자전거. 만화를 통해서도 다양한 자전거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단편 옴니버스 형식인 <내 마음 속의 자전거>(미야오 가쿠, 서울문화사, 13권 발간)는 ‘아오바’라는 자전거포를 중심으로 자전거와 그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전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만화책.

우리 주변에 있을 듯한 남동생, 여동생, 아줌마, 아저씨 들이 자전거와 함께 교감을 나눠가는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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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감동적으로 그렸다. 제목만 봐도 그렇듯이 건전함이 흘러넘치지만 아름다운 자전거의 설명은 유혹적이다.
자전거 커뮤니티에 가면 이 책을 통해 고가의 미니벨로를 구입해버렸다는 독자들이 숱하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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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와 함께 애호가들 많기로 소문난 바이크를 다룬 만화 중 눈길이 가는 것은  <쟈쟈>(에노 아키라, 서울문화사, 4권 완간)다. 바이크 천국이라고 불리는 일본에서조차 구하기 힘든 레어 이탈리아 바이크를 다룬 매니악한 만화다. 비슷한 종류로 유명한 이탈리아산 기종인 베스파를 다룬 <모터록>이란 만화도 있지만 현재 절판되어서 이 만화를 추천한다. <내 마음속의 자전거>처럼 목숨 걸고(?) 바이크에 매달리는 인간들의 이야기지만 조금 어른스럽고 더 위험하다. 하지만 종이 속에서 전해져오는 제작자, 라이더 그리고 만화가의 열정이 뜨겁다. 바이크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만화고, 바이크 팬이 아니더라도 진지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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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직 한 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관심이 가는 작품을 소개한다. 소재는 바로 등산. <산>(신이치 이시즈카, 학산문화사, 1권 발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산악 구조인에 대한 만화다. 산을 좋아해서 네팔 · 북남미· 유럽 등 세계 곳곳의 산을 타는, 그러면서 민간 구조 자원봉사자로서 산악 구조 대원으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프로의 세계를 다룬 만화는 정말 흡인력이 대단하다. 만화를 통한 취미 생활로도 그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 2007년 2월 월간 <도베>에 썼던 글이다. 언급된 만화는 현재 더 많은 권수가 출간되었다. 추석 때 볼만한 만화를 고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올린다.




tip
알아두면 유용한 만화 정보 사이트

코믹시스트 www.comixest 만화계 소식에 대한 광범위하고 빠른 정보 업데이트와 10점 만점의 독자 평점이 참고할 만하다.
바람검객의 만화 이야기 www.comicfirst.com 만화 관련 기사를 읽을 수 있고 추천 만화에 전문가 만화가 잘 소개되어 있다.
아까짱의 이 만화 꼭 봐라 kori2sal.egloos.com 국내 개인 블로그로서 방대한 만화 정보와 전문적인 평을 구경할 수 있다.
코믹 파크 blog.naver.com/enterani : 만화평론가이자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인 박인하 씨의 블로그. 한국 만화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함께 인터넷 만화에 대한 추천글이 상세하다.

절판 만화책 구하는 법 우리나라는 만화책의 수명이 매우 짧다. 대원씨아이, 학산문화사, 서울 문화사와 같은 메이저 출판사도 지속적으로 절판시키기 때문에 소장하고 싶은 만화는 무조건 사둬야 한다. 특히 시공사와 세주문화사 등 더 이상 만화책을 내지 않는 출판사에서 나온 만화책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그러나 몇 가지 방법은 있다.
1 도매상 만화 전문 서점을 찾는다_코믹뱅크( www.comicbank.co.kr), 굿모닝 서점( www.goodmorningbook.com ), 한양문고( www.toonk.com )에서는 시중에서 절판된 만화라도 재고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2 중고 헌책방을 뒤져본다_만화 전문 헌책방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좋은책많은데( www.obestbook.com)’ 다. 보유하고 있는 만화가 20만 권이라 원하는 책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 영화 <올드보이> 촬영 전, 조감독이 원작 만화 한국어판을 발견하고 만세를 부른 곳으로 유명해졌다.
3 대여점이나 만화책방 주인에게 팔라고 사정한다._적극적으로 시도하면 통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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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대면한 후 세상은 훨씬 아름답게 빛난다



제주도에 한 사내가 살고 있다. 사진에 미친 사내다. 섬에 홀린 사내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사진을 찍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가족들을 괴롭혔다. 아버지의 술보다 자신의 사진이 몇 십 배나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예술가는 외롭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온종일 들판을 거닐었다. 자연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에게 사진은 기다림이다. 사진은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 한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황홀함은 삽시간에 끝난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사진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시인은 한 줄의 문장을 위해 한 달을 아파한다. 화가는 한 번의 붓질을 위해 몇 년을 아파한다. 사진가는 한 번의 셔터를 누르기 위해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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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선생은 한라산을 영혼의 고향으로 삼고 제주의 자연이 망가지기 이전, 탐라의 원형이 남아 있는 제주를 기록한다. 섬의 매력에 홀려 1985년부터 20년 넘는 세월 동안 그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기록해 왔다. 그는 사진을 팔지 않았다. 사진 청탁도 거절했다.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생활하는 그 자체로 만족했다. 가난은 필연이다. 눈보라 치는 한겨울 북제주군 대천동 산간마을에 살면서 난방이라고는 전기장판 한개. 그나마 밤중에만 사용했다. 라면도 여의치 않을 때는 냉수 한 사발로 끼니를 때웠다. 먹을 것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필름과 인화지가 떨어지는 것이다. 굶주림은 작업하며 견딜 수  있지만 작업을 못하는 서글픔만은 참지 못한다. 그럴 때는 카메라 대신 눈으로 찍고 마음에 인화를 한다. 제 몸 버리는 줄도 모르고 사진에 영혼을 담았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20여 만 컷. 몇 번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점점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생활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1999년 제주도청에서 열네 번째 전시회를 마친 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허리가 아팠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다리가 마비됐다. 2001년 말 원인을 알았다. 의사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는 병명을 들려줬다. 온 몸의 근육이 촛농처럼 흘러 사라지는 희귀병, ‘루게릭병’이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년 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던 그때를, 지금은 한없이 그리워할 뿐이다. 온종일 들녘을 헤메 다니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춥고 배고팠던 그때가 간절히 그립다.” - <그섬에 내가 있었네> 27쪽

2002년, 절망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자 가장 먼저 걱정된 것이 필름과 사진이었다. 박제가 되어가는 몸으로 폐교를 임대해 돌을 나르고 나무를 심었다. 사랑하는 제주도를 옮겨 심었다. 갤러리 두모악. 한라산의 옛 이름을 빌렸다. 자신을 위한 집이 아니라 목숨처럼 소중한 사진을 위한 집이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잊혀진 제주를 발견했다고, 감동했다고 말한다. 그는 쓸쓸히 웃을 뿐이다. 의사는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지만 올해로 투병 7년째,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사진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3월 24일부터 4월 4일까지 열린다. 작년에 출간되어 세상에 그를 알린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Books刊)의 사진과 ‘구름이 내게 가져다준 행복’ 연작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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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은 1996년에 절판된 책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에다 투병 이후의 구술 원고를 추가해 펴낸 것이다. 글이 참 쓸쓸하고 아름답다.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는 그는 글 솜씨도 뛰어나다. 하지만 당대의 문장가는 아니다. 사진은 다르다. 김영갑 선생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사진을 하는 한 선배는 “대한민국에서 사진으로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 유일한 사람”이라며 말을 흐렸다.


바람의 나라, 신화의 땅, 탐라에 도착하다

제주공항의 바람은 거셌다. 마치 따귀를 맞은 듯 양 볼이 얼얼하다. 산업도로를 타고 표선방향으로 달려간다. 너른 들판에 봉분 같은 오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제주도의 오름은 경주의 왕릉과 닮았다. 마치 신들이 잠들어 있는 장엄한 무덤 사이를 지나는 것 같다. 태초에 돌과 바람만이 거주하던 이 섬에 땅에서 삼신三神이 솟아나와 탐라국을 창건했다. 그렇다면 오름 역시 신의 자취임이 분명하다. 제주도에는 이런 오름이 3백60여 개나 있다. 삼달리에 거의 다 왔다. 학교 같은 건물을 찾아 천천히 차를 몰다 보니 조그만 간판이 보인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정원은 공사 중이다. 공사를 감독하는 이가 김영갑 씨다. 헐벗은 정원수 옆에 있는 그의 몸은 겨울나무처럼 앙상하다. 나무를 옮겨 삼을 장소와 돌을 쌓는 위치를 인부들에게 일러준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좋아 보인다. 평일 오전인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아와 오름을, 제주를, 지금도 용감하게 ‘살아 내고’ 있는 김영갑의 영혼을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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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바꾸고 싶습니다. 좀 더 제주도의 자연과 비슷하게 꾸미고 싶습니다. 바람이 잦은 날에는 가만히 서있는 것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낮에 힘들어야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저 같은 투병환자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합니다. 매일 움직이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어느 성직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감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숟가락 들 힘조차 없다. 얼굴 근육이 말라붙어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래도 그는 감사해하고 있다. 온 몸이 굳어져 혀조차 움직이기 거북한 상태에서 혼은 살아 싱싱하게 뛰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정원과 전시장을 만드는 것은 몸 성한 사람에게도 벅차다. 몇몇 폐교를 이용한 예술 공간이라는 곳을 가봤지만 대충 흉내만 냈을 뿐 개인 작업실에 불과했다. 여기는 완벽한 갤러리이다. 초가의 서까래를 이용한 조각으로 갤러리 내부에 서있고 바닥에는 구멍뚫린  돌맹이들이 야트막하게 깔려있다. 실내에도 최대한 제주의 자연을 들여놨다. 벽을 따라 파노라마 사진이 걸려 있다. 거대한 제주의 자연이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드넓은 방목장은 골프장으로 변했고 아름다운 들녘은 리조트와 펜션으로 변했습니다. 제주도의 정체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져갑니다. 내 사진이 제주를 이야기할 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의 평화와 고요가 그 안에는 있으니까요.”

그가 찍은 사진은 흔한 제주도의 풍경이 아니었다. 제주도 토박이조차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섬의 은은한 황홀이다. 자연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황홀경을 담기 위해 그는 밤이슬에 몸이 흠뻑 젖는 것도 모른 채 초원에 엎드려 있었다. 절벽에다 몸을 묶고 파도를 찍었다. 그리고 수없이 오름에 올랐다. 자연의 변화를 담기 위해 십수 년, 같은 장소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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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안개비에 젖어 섬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를 외롭게 만든다. 섬에서도 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유독 안개가 많고 비가 잦다. 광활한 초원의 목초지가 수평선까지 이어지고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군데군데 솟아오른 오름들은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중산간의 초원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82쪽

사람들은 그가 산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손바닥만한 창으로 기적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운 세상을 보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처음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카메라만 들고 산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간첩으로 오인받은 적도 있었다. 대공안실에서 취조를 당하고 셋집에서 내쫒겼다. 아직도 나이든 어르신들은 4. 3사건을, 제주 전체가 붉은 광기로 물든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 역사까지도 사진에 담고 싶었다. 


풍경 속에 녹아든 역사와 문화를 찍는 사람

같은 풍경이라도 제주도 사람이 설명하면 다르다. 선생과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던 <해뜨는 집> 펜션의 강중훈 사장은 일출봉 옆 해안가를 가리키며 4. 3사건 때 학살당한 마을 주민이 묻힌 곳이라 들려줬다. 자신의 부모님 모두 그때 잃었다는 얘기와 함께. 김영갑 선생에게 그렇게 사랑하는 이 땅에서 ‘제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서러운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

“사람은 자연환경, 주변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아메리카인, 호주인, 한국인 다 다른 것처럼, 기름진 땅에 심은 나무와 척박한 땅에 심은 나무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제주인은 언제나 섬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인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고 합니다. 느긋하다, 배타적이다 등. 빵 하나를 다섯 사람이 나눠먹어도 부족한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빵을 여섯으로 나눠야 합니다. 외지인을 경계하는 제주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주인이 되려면 3대가 지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김영갑 씨는 올해로 꼭 20년 째, 여전히 ‘가장 제주를 아는 외지인’일 뿐이다. 하지만 제주의 자연이 들려주는 신비한 음성은 그만이 들을 수 있었다.

“제주도의 어느 한 구석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제주도라는 대서사시, 역사와 문화를 담고 싶었습니다. 내 작품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사진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면 시를 썼을 것입니다, 나는 연작시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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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렇게 사랑한 오름들을 더 이상 찍지는 못하지만, ‘살고 싶다는 나의 기도는 사진’이라 말했던 그가 찍은 필름들은 아직도 오롯이 남아 있다. 이번에 새로 인화한 오름의 사진들에는 그래서인지, 처절한 아픔과 준열한 자기 점검의 시간들이 더해졌다. 전시되고 있는 용눈이 오름의 사진들은 한없이 풍성하고 따뜻하지만 그러면서도, 참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관광지로 개발되는 제주를 묵묵히 지켜보는 오름의 사진에서 사위어 가는 그의 육체와 점점 맑아져 가는 영혼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작년 11월 제주시 문화회관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가칭 ‘김영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후원음악회를 마련한 것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던 약 1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사진이 좋다는 이유로 기꺼이 후원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생태 전문 여행사인 ‘야기 제주’의 직원들도 모임의 일원이다. 처음에는 사진에 반하고 다음에는 진정한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자신들의 꿈을 수십 년 전부터 사진으로 보여준 한 사람에 반했다. 그래서 생태 여행을 하려는 관광객들에게 제일 먼저 소개하는 곳도 두모악 갤러리다. 고제량 부장은 김영갑 선생을 가리켜 “제주도 사람이 아니면서 제주인인 저보다 섬을 더 잘 알고 계신 분”이라 설명한다. “선생님께서 자신의 사진은 제주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 놔둬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관광객들이 이 사진을 보려면 제주도에 와야 하는 것처럼 제주도에 이롭게 쓰이길 원하셨죠.” 홍경철 사장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눈을 뜨고 있어도 발견하기 힘든 제주의 본 모습”이라며 팬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단다. 오병훈 이사는 “김영감 선생이 살아 움직이는 게 기쁘지만 여전히 자신의 실속은 차리지 않는 걸 보고 화가 난다”며 한숨을 쉰다. 서울의 여느 갤러리 못지않은 시설을 유지하려면 돈이 든다. 하지만 입구에 놓인 모금함도 ‘감동을 받은 만큼’만 내라고 써있을 뿐이다. 그나마 작년 말에 지인들이 하도 성화를 해 놓은 것이다.

“예전에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이 갤러리를 제대로 지어줄 테니 내가 관장을 맡고 나 다음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추사 선생님의 기념관에 가보세요. 오리지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관리가 엉망이었던 거죠. 사진은 내 영혼입니다. 내 육신은 망가져도 영혼은 상처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수십 개의 라면 상자에 가득 채워진 필름을 다 불살라 없애겠다고 말한다. 그것들을 자신만큼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눈, 비, 안개, 바람의 환상곡

“저는 오름이나 초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사물과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환경을 담고 싶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풍경을 가리는 안개, 사위를 잠재우는 비와 눈. 정말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아직은 일반사람들이 제 사진을 어떻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갤러리를 지었지만 여전히 보관이 가장 큰 문제다. 곰팡이가 핀 채로 잠들어 있는 필름과 인화지를 생각하니 속이 상한다. 그는 이렇게 없애나 저렇게 없애나 전시나 실컷 하자고 생각해서 올 초부터 계속 전시회를 열고 있다. 앞으로 한두 번은 더 전시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에 10회 이상 계획하고 있단다. 눈을 보니 진담인 것 같다. 그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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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다른 게 아닙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 잔물결이 없는 상태. 무신경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것도 불만족한 것도 없는 상태. 마음의 갈등이 없는 상태... 아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게 2년이 넘었습니다. 동서남북 바람처럼 떠돌다가 이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만은 갇혀있지 않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요즘이 가장 행복합니다. 죽음이 턱밑에 와있습니다. 침대에서 나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지금은 어떠한 욕심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삶이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좋은 사진을 찍고 좋은 지면에 발표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불행했습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울며 웃고, 욕심내고,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분한 것이 사는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삶에 대한 욕심마저 포기한 것은 아닌지 슬퍼졌다. 다행히 그의 눈은 포기를 말하고 있지 않다. 마음이 슬플 때, 우리는 구름이 꼈다는 표현을 쓴다. 구름은 행, 불행의 척도다. 구름은 365일 다 다르다. 구름이 흐르듯 마음도 흐른다. 맑았던 마음도 순식간에 욕망과 갈등으로 어지럽혀진다. 그는 이제 욕망을 바라지 않는 것뿐이다.

식물인간과는 정반대의 현실. 어쩔 때는 하루 종일 누워 지낸다. 몇 개월을 그러면 변을 보지 못해 괴롭다. 위와 장이 힘을 잃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 대소변만 내손으로 처리했으면 해요. 작년에는 너무 힘들어서 호스피스가 있는 요양원에 가려고 했어요. 요양원에 가려고 했을 때는 누워만 있었거든. 그러니 점점 움직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지난 1월에 있었던 프레스 센터 전시를 준비하면서 움직여야 하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었죠. 내가 자꾸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걸 만들지 않으면 안되요.”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99쪽

잠시 몸을 뒤튼다. 말하는 것도 그에게는 고통이다. 이미 인터뷰 시간이 30분을 넘었다. 이렇게 오래 이야기 한 적이 근래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담배를 핀다. 담배는 그에게 살아있음의 증거다. 중환자라는 것을 자꾸 잊으려고 의식적으로 일상적인 행동을 한다. 현재 모든 치료를 중단한 채 자연의 치유력에 몸을 맡기고 있다. 다리 한쪽이 절단된 노루가 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처럼 자신이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담배 피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태우고 싶어도 라이터를 못키니 참을 때가 많습니다. 난로가 있으면 불꽃에다 담배를 가까이해 불을 붙입니다. 원시적이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두모악 갤러리의 직원은 사실 제자들이다. 낮 시간에는 그들이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사진을 전공한 그들은 뭍에서 왔다. “선생님이 혼내실 때는 너무 엄하시다”며 쑥스럽게 웃는다.

“저는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습니다. 강의실에서 들을 수 있는 사진 이론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대신 1년 안에 개인전을 열 사람들에게 사물을 보는 눈을 가르칩니다. 빛과 공기의 흐름을 보는 법이죠. 제주의 대자연은 아무에게나 속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찰나를 잡으려면 사물의 내면을 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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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조차 돌아간 밤에는 방에 혼자 누워 있다. 눈을 뜨면 불구의 육신이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 자신이 봤던 황홀한 풍경 속에서 그는 자유롭다. 요즘은 제주를 정원에 옮겨 심는 생각에 빠져있다. 이 학교를 5년 동안 임대했으니 이제 1년 남았지만 그 1년이 10년이라도 된 듯 계획은 끝없이 펼쳐진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 존재가 잊혀질지라도 나의 사진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66쪽

그중 가장 기쁜 것은 그의 변화다. 아프고 난 후 거울을 보는 것도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도 거부해온 그였다. 갤러리를 짓고 사진전을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태어났다.

“제주도만한 섬이 없어요. 눈, 비, 바람, 구름. 여기는 이 모든 것이 흘러요, 살아있죠. 진짜 기막힌 섬이지. 이제야 제주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해보고 싶어 삶의 연장을 노력하죠. 봄부터 더 적극적으로 살겁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더라도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아름다움이 내 영혼을 구원할거라고 믿습니다.”

두모악, 한라산의 옛 이름. 일본의 후지산처럼 어느 곳에서 보나 같은 모습의 산이 아니다. 그는 20년을 산에서 보냈는데도 ‘이것이 한라산이요’라고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 없단다. 그것이 바로 한라산이다. 두모악 갤러리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다고 김영갑이란 사진가를 안다고 착각하지 말길. “죽음을 대면해 보기 전의 그 아름다움은 지금 내가 이해하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진작가 김영갑. 그는 겨우 48세의 나이다. 그가 이제 어떠한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사진에 담아낼까? 나는 그에게서 아름다운 삶의 정수를 읽는다. 베토벤에게 귀를 빼앗아갔던 ‘운명’이라는 잔인한 존재는 그에게 ‘루게릭’이라는 천형을 안겨 주었지만 꽃은 피고, 바람은 불고 그는 다시 사진을 찍을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064-784-9906, www.dumoak.co.kr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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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집을 밤새 읽고 그의 팬이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갤러리를 방문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몸으로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눈물이 났다. 책에다 사인을 받고 싶었으나 휴지 한 장을 손으로 들기도 힘든 몸. 뜻밖에도 김영갑 선생은 흔쾌히 청을 받아 주었다. 한 손으로는 사인을 하기 힘들어 왼팔로 오른팔을 받치고 힘겹게 적는다. “의식적으로 무엇을 하기는 힘들지만 내 이름 석자를 적는 것처럼 손에 익은 것은 아직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몸의 신비인가보다”며 웃는다. 아니, 근육이 말을 안 들어 미소 짖지는 못하지만 나는 분명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2005년 2월)



추신2

2005년 5월 29일,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일부는 제주도로 급히 떠나고, 나처럼 세상 삶이 분명하지 못한 인간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도 두모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홍수피해가 났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개발이 제주의 자연을 바꾸고 있다. 그가 사랑한 제주가 생각나 옛 글을 올린다.(2007년 9월)

Posted by 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