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면한 후 세상은 훨씬 아름답게 빛난다
제주도에 한 사내가 살고 있다. 사진에 미친 사내다. 섬에 홀린 사내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사진을 찍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가족들을 괴롭혔다. 아버지의 술보다 자신의 사진이 몇 십 배나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예술가는 외롭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온종일 들판을 거닐었다. 자연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에게 사진은 기다림이다. 사진은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 한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황홀함은 삽시간에 끝난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사진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시인은 한 줄의 문장을 위해 한 달을 아파한다. 화가는 한 번의 붓질을 위해 몇 년을 아파한다. 사진가는 한 번의 셔터를 누르기 위해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김영갑 선생은 한라산을 영혼의 고향으로 삼고 제주의 자연이 망가지기 이전, 탐라의 원형이 남아 있는 제주를 기록한다. 섬의 매력에 홀려 1985년부터 20년 넘는 세월 동안 그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기록해 왔다. 그는 사진을 팔지 않았다. 사진 청탁도 거절했다.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생활하는 그 자체로 만족했다. 가난은 필연이다. 눈보라 치는 한겨울 북제주군 대천동 산간마을에 살면서 난방이라고는 전기장판 한개. 그나마 밤중에만 사용했다. 라면도 여의치 않을 때는 냉수 한 사발로 끼니를 때웠다. 먹을 것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필름과 인화지가 떨어지는 것이다. 굶주림은 작업하며 견딜 수 있지만 작업을 못하는 서글픔만은 참지 못한다. 그럴 때는 카메라 대신 눈으로 찍고 마음에 인화를 한다. 제 몸 버리는 줄도 모르고 사진에 영혼을 담았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20여 만 컷. 몇 번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점점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생활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1999년 제주도청에서 열네 번째 전시회를 마친 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허리가 아팠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다리가 마비됐다. 2001년 말 원인을 알았다. 의사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는 병명을 들려줬다. 온 몸의 근육이 촛농처럼 흘러 사라지는 희귀병, ‘루게릭병’이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년 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던 그때를, 지금은 한없이 그리워할 뿐이다. 온종일 들녘을 헤메 다니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춥고 배고팠던 그때가 간절히 그립다.” - <그섬에 내가 있었네> 27쪽
2002년, 절망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자 가장 먼저 걱정된 것이 필름과 사진이었다. 박제가 되어가는 몸으로 폐교를 임대해 돌을 나르고 나무를 심었다. 사랑하는 제주도를 옮겨 심었다. 갤러리 두모악. 한라산의 옛 이름을 빌렸다. 자신을 위한 집이 아니라 목숨처럼 소중한 사진을 위한 집이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잊혀진 제주를 발견했다고, 감동했다고 말한다. 그는 쓸쓸히 웃을 뿐이다. 의사는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지만 올해로 투병 7년째,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사진전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3월 24일부터 4월 4일까지 열린다. 작년에 출간되어 세상에 그를 알린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Human&Books刊)의 사진과 ‘구름이 내게 가져다준 행복’ 연작이 전시된다.
에세이집은 1996년에 절판된 책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에다 투병 이후의 구술 원고를 추가해 펴낸 것이다. 글이 참 쓸쓸하고 아름답다.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는 그는 글 솜씨도 뛰어나다. 하지만 당대의 문장가는 아니다. 사진은 다르다. 김영갑 선생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사진을 하는 한 선배는 “대한민국에서 사진으로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 유일한 사람”이라며 말을 흐렸다.
바람의 나라, 신화의 땅, 탐라에 도착하다
제주공항의 바람은 거셌다. 마치 따귀를 맞은 듯 양 볼이 얼얼하다. 산업도로를 타고 표선방향으로 달려간다. 너른 들판에 봉분 같은 오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제주도의 오름은 경주의 왕릉과 닮았다. 마치 신들이 잠들어 있는 장엄한 무덤 사이를 지나는 것 같다. 태초에 돌과 바람만이 거주하던 이 섬에 땅에서 삼신三神이 솟아나와 탐라국을 창건했다. 그렇다면 오름 역시 신의 자취임이 분명하다. 제주도에는 이런 오름이 3백60여 개나 있다. 삼달리에 거의 다 왔다. 학교 같은 건물을 찾아 천천히 차를 몰다 보니 조그만 간판이 보인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정원은 공사 중이다. 공사를 감독하는 이가 김영갑 씨다. 헐벗은 정원수 옆에 있는 그의 몸은 겨울나무처럼 앙상하다. 나무를 옮겨 삼을 장소와 돌을 쌓는 위치를 인부들에게 일러준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좋아 보인다. 평일 오전인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아와 오름을, 제주를, 지금도 용감하게 ‘살아 내고’ 있는 김영갑의 영혼을 만나고 있었다.
“정원을 바꾸고 싶습니다. 좀 더 제주도의 자연과 비슷하게 꾸미고 싶습니다. 바람이 잦은 날에는 가만히 서있는 것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낮에 힘들어야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저 같은 투병환자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합니다. 매일 움직이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어느 성직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감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숟가락 들 힘조차 없다. 얼굴 근육이 말라붙어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래도 그는 감사해하고 있다. 온 몸이 굳어져 혀조차 움직이기 거북한 상태에서 혼은 살아 싱싱하게 뛰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정원과 전시장을 만드는 것은 몸 성한 사람에게도 벅차다. 몇몇 폐교를 이용한 예술 공간이라는 곳을 가봤지만 대충 흉내만 냈을 뿐 개인 작업실에 불과했다. 여기는 완벽한 갤러리이다. 초가의 서까래를 이용한 조각으로 갤러리 내부에 서있고 바닥에는 구멍뚫린 돌맹이들이 야트막하게 깔려있다. 실내에도 최대한 제주의 자연을 들여놨다. 벽을 따라 파노라마 사진이 걸려 있다. 거대한 제주의 자연이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드넓은 방목장은 골프장으로 변했고 아름다운 들녘은 리조트와 펜션으로 변했습니다. 제주도의 정체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져갑니다. 내 사진이 제주를 이야기할 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의 평화와 고요가 그 안에는 있으니까요.”
그가 찍은 사진은 흔한 제주도의 풍경이 아니었다. 제주도 토박이조차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섬의 은은한 황홀이다. 자연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황홀경을 담기 위해 그는 밤이슬에 몸이 흠뻑 젖는 것도 모른 채 초원에 엎드려 있었다. 절벽에다 몸을 묶고 파도를 찍었다. 그리고 수없이 오름에 올랐다. 자연의 변화를 담기 위해 십수 년, 같은 장소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종종 안개비에 젖어 섬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를 외롭게 만든다. 섬에서도 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유독 안개가 많고 비가 잦다. 광활한 초원의 목초지가 수평선까지 이어지고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군데군데 솟아오른 오름들은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중산간의 초원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82쪽
사람들은 그가 산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손바닥만한 창으로 기적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운 세상을 보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처음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카메라만 들고 산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간첩으로 오인받은 적도 있었다. 대공안실에서 취조를 당하고 셋집에서 내쫒겼다. 아직도 나이든 어르신들은 4. 3사건을, 제주 전체가 붉은 광기로 물든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이 역사까지도 사진에 담고 싶었다.
풍경 속에 녹아든 역사와 문화를 찍는 사람
같은 풍경이라도 제주도 사람이 설명하면 다르다. 선생과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던 <해뜨는 집> 펜션의 강중훈 사장은 일출봉 옆 해안가를 가리키며 4. 3사건 때 학살당한 마을 주민이 묻힌 곳이라 들려줬다. 자신의 부모님 모두 그때 잃었다는 얘기와 함께. 김영갑 선생에게 그렇게 사랑하는 이 땅에서 ‘제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서러운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
“사람은 자연환경, 주변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아메리카인, 호주인, 한국인 다 다른 것처럼, 기름진 땅에 심은 나무와 척박한 땅에 심은 나무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제주인은 언제나 섬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인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고 합니다. 느긋하다, 배타적이다 등. 빵 하나를 다섯 사람이 나눠먹어도 부족한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빵을 여섯으로 나눠야 합니다. 외지인을 경계하는 제주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주인이 되려면 3대가 지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김영갑 씨는 올해로 꼭 20년 째, 여전히 ‘가장 제주를 아는 외지인’일 뿐이다. 하지만 제주의 자연이 들려주는 신비한 음성은 그만이 들을 수 있었다.
“제주도의 어느 한 구석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제주도라는 대서사시, 역사와 문화를 담고 싶었습니다. 내 작품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사진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면 시를 썼을 것입니다, 나는 연작시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사랑한 오름들을 더 이상 찍지는 못하지만, ‘살고 싶다는 나의 기도는 사진’이라 말했던 그가 찍은 필름들은 아직도 오롯이 남아 있다. 이번에 새로 인화한 오름의 사진들에는 그래서인지, 처절한 아픔과 준열한 자기 점검의 시간들이 더해졌다. 전시되고 있는 용눈이 오름의 사진들은 한없이 풍성하고 따뜻하지만 그러면서도, 참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관광지로 개발되는 제주를 묵묵히 지켜보는 오름의 사진에서 사위어 가는 그의 육체와 점점 맑아져 가는 영혼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작년 11월 제주시 문화회관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가칭 ‘김영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후원음악회를 마련한 것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던 약 1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사진이 좋다는 이유로 기꺼이 후원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생태 전문 여행사인 ‘야기 제주’의 직원들도 모임의 일원이다. 처음에는 사진에 반하고 다음에는 진정한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자신들의 꿈을 수십 년 전부터 사진으로 보여준 한 사람에 반했다. 그래서 생태 여행을 하려는 관광객들에게 제일 먼저 소개하는 곳도 두모악 갤러리다. 고제량 부장은 김영갑 선생을 가리켜 “제주도 사람이 아니면서 제주인인 저보다 섬을 더 잘 알고 계신 분”이라 설명한다. “선생님께서 자신의 사진은 제주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 놔둬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관광객들이 이 사진을 보려면 제주도에 와야 하는 것처럼 제주도에 이롭게 쓰이길 원하셨죠.” 홍경철 사장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눈을 뜨고 있어도 발견하기 힘든 제주의 본 모습”이라며 팬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단다. 오병훈 이사는 “김영감 선생이 살아 움직이는 게 기쁘지만 여전히 자신의 실속은 차리지 않는 걸 보고 화가 난다”며 한숨을 쉰다. 서울의 여느 갤러리 못지않은 시설을 유지하려면 돈이 든다. 하지만 입구에 놓인 모금함도 ‘감동을 받은 만큼’만 내라고 써있을 뿐이다. 그나마 작년 말에 지인들이 하도 성화를 해 놓은 것이다.
“예전에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이 갤러리를 제대로 지어줄 테니 내가 관장을 맡고 나 다음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추사 선생님의 기념관에 가보세요. 오리지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관리가 엉망이었던 거죠. 사진은 내 영혼입니다. 내 육신은 망가져도 영혼은 상처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수십 개의 라면 상자에 가득 채워진 필름을 다 불살라 없애겠다고 말한다. 그것들을 자신만큼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눈, 비, 안개, 바람의 환상곡
“저는 오름이나 초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사물과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환경을 담고 싶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풍경을 가리는 안개, 사위를 잠재우는 비와 눈. 정말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아직은 일반사람들이 제 사진을 어떻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갤러리를 지었지만 여전히 보관이 가장 큰 문제다. 곰팡이가 핀 채로 잠들어 있는 필름과 인화지를 생각하니 속이 상한다. 그는 이렇게 없애나 저렇게 없애나 전시나 실컷 하자고 생각해서 올 초부터 계속 전시회를 열고 있다. 앞으로 한두 번은 더 전시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에 10회 이상 계획하고 있단다. 눈을 보니 진담인 것 같다. 그는 살아있다.
“행복은 다른 게 아닙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 잔물결이 없는 상태. 무신경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것도 불만족한 것도 없는 상태. 마음의 갈등이 없는 상태... 아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게 2년이 넘었습니다. 동서남북 바람처럼 떠돌다가 이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만은 갇혀있지 않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요즘이 가장 행복합니다. 죽음이 턱밑에 와있습니다. 침대에서 나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지금은 어떠한 욕심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삶이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좋은 사진을 찍고 좋은 지면에 발표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불행했습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울며 웃고, 욕심내고,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분한 것이 사는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삶에 대한 욕심마저 포기한 것은 아닌지 슬퍼졌다. 다행히 그의 눈은 포기를 말하고 있지 않다. 마음이 슬플 때, 우리는 구름이 꼈다는 표현을 쓴다. 구름은 행, 불행의 척도다. 구름은 365일 다 다르다. 구름이 흐르듯 마음도 흐른다. 맑았던 마음도 순식간에 욕망과 갈등으로 어지럽혀진다. 그는 이제 욕망을 바라지 않는 것뿐이다.
식물인간과는 정반대의 현실. 어쩔 때는 하루 종일 누워 지낸다. 몇 개월을 그러면 변을 보지 못해 괴롭다. 위와 장이 힘을 잃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 대소변만 내손으로 처리했으면 해요. 작년에는 너무 힘들어서 호스피스가 있는 요양원에 가려고 했어요. 요양원에 가려고 했을 때는 누워만 있었거든. 그러니 점점 움직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지난 1월에 있었던 프레스 센터 전시를 준비하면서 움직여야 하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었죠. 내가 자꾸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걸 만들지 않으면 안되요.”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99쪽
잠시 몸을 뒤튼다. 말하는 것도 그에게는 고통이다. 이미 인터뷰 시간이 30분을 넘었다. 이렇게 오래 이야기 한 적이 근래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담배를 핀다. 담배는 그에게 살아있음의 증거다. 중환자라는 것을 자꾸 잊으려고 의식적으로 일상적인 행동을 한다. 현재 모든 치료를 중단한 채 자연의 치유력에 몸을 맡기고 있다. 다리 한쪽이 절단된 노루가 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처럼 자신이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담배 피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태우고 싶어도 라이터를 못키니 참을 때가 많습니다. 난로가 있으면 불꽃에다 담배를 가까이해 불을 붙입니다. 원시적이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두모악 갤러리의 직원은 사실 제자들이다. 낮 시간에는 그들이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사진을 전공한 그들은 뭍에서 왔다. “선생님이 혼내실 때는 너무 엄하시다”며 쑥스럽게 웃는다.
“저는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습니다. 강의실에서 들을 수 있는 사진 이론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대신 1년 안에 개인전을 열 사람들에게 사물을 보는 눈을 가르칩니다. 빛과 공기의 흐름을 보는 법이죠. 제주의 대자연은 아무에게나 속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찰나를 잡으려면 사물의 내면을 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조차 돌아간 밤에는 방에 혼자 누워 있다. 눈을 뜨면 불구의 육신이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 자신이 봤던 황홀한 풍경 속에서 그는 자유롭다. 요즘은 제주를 정원에 옮겨 심는 생각에 빠져있다. 이 학교를 5년 동안 임대했으니 이제 1년 남았지만 그 1년이 10년이라도 된 듯 계획은 끝없이 펼쳐진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 존재가 잊혀질지라도 나의 사진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66쪽
그중 가장 기쁜 것은 그의 변화다. 아프고 난 후 거울을 보는 것도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도 거부해온 그였다. 갤러리를 짓고 사진전을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태어났다.
“제주도만한 섬이 없어요. 눈, 비, 바람, 구름. 여기는 이 모든 것이 흘러요, 살아있죠. 진짜 기막힌 섬이지. 이제야 제주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해보고 싶어 삶의 연장을 노력하죠. 봄부터 더 적극적으로 살겁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더라도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아름다움이 내 영혼을 구원할거라고 믿습니다.”
두모악, 한라산의 옛 이름. 일본의 후지산처럼 어느 곳에서 보나 같은 모습의 산이 아니다. 그는 20년을 산에서 보냈는데도 ‘이것이 한라산이요’라고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 없단다. 그것이 바로 한라산이다. 두모악 갤러리에서 그의 사진을 보았다고 김영갑이란 사진가를 안다고 착각하지 말길. “죽음을 대면해 보기 전의 그 아름다움은 지금 내가 이해하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진작가 김영갑. 그는 겨우 48세의 나이다. 그가 이제 어떠한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사진에 담아낼까? 나는 그에게서 아름다운 삶의 정수를 읽는다. 베토벤에게 귀를 빼앗아갔던 ‘운명’이라는 잔인한 존재는 그에게 ‘루게릭’이라는 천형을 안겨 주었지만 꽃은 피고, 바람은 불고 그는 다시 사진을 찍을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064-784-9906, www.dumoak.co.kr
추신
에세이집을 밤새 읽고 그의 팬이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갤러리를 방문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몸으로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눈물이 났다. 책에다 사인을 받고 싶었으나 휴지 한 장을 손으로 들기도 힘든 몸. 뜻밖에도 김영갑 선생은 흔쾌히 청을 받아 주었다. 한 손으로는 사인을 하기 힘들어 왼팔로 오른팔을 받치고 힘겹게 적는다. “의식적으로 무엇을 하기는 힘들지만 내 이름 석자를 적는 것처럼 손에 익은 것은 아직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몸의 신비인가보다”며 웃는다. 아니, 근육이 말을 안 들어 미소 짖지는 못하지만 나는 분명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2005년 2월)
추신2
2005년 5월 29일,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일부는 제주도로 급히 떠나고, 나처럼 세상 삶이 분명하지 못한 인간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도 두모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홍수피해가 났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개발이 제주의 자연을 바꾸고 있다. 그가 사랑한 제주가 생각나 옛 글을 올린다.(2007년 9월)
Posted by B.H.